일본 왕실의 보물을 보관하고 있는 정창원에는 아름다운 바둑판과 바둑돌이 있다.
백제 의자왕이 선물한 바둑돌과 일본에서는 부정하지만 역시 의자왕이 선물한걸로 보이는 바둑판이 그것이다.

백제의 바둑알

바둑돌의 경우 코끼리의 상아를 염색하여 표면을 조각해서 만든 걸로 홍아발루기자(紅牙撥鏤棊子),감아발루기자(紺牙撥鏤棊子) 두가지와 석영으로 만든 흑기자(黑棊子), 사문석으로 만든 백기자(白棊子)가 있다. 

왼쪽이 감아발루기자(紺牙撥鏤棊子), 오른쪽이 홍아발루기자(紅牙撥鏤棊子)

백제의 바둑판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 사진에 보이는 서랍 한쪽을 열면 자동으로 반대쪽 서랍도 열린다.


바둑통 은평탈합자(銀平脫合子)

사진은 문제가 되고 있는 바둑판으로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알려진 바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제 바둑판이라고 한다. 자주빛이 나는 자단이라는 나무위에 상아를 박아 만든 것이 특징인데, 특히 옆면에는 아름다운 그림이 새겨져 있다. 같은 세트로 추정되는 바둑통 '은평탈합자(銀平脫合子)'에는 코끼리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일본측에서는 바둑알과 바둑통은 의자왕이 선물해줬다는 기록이 있어 백제의 선물로 인정하지만 기록이 전혀 없는 바둑판은 중국에서 제작되어 백제를 통해 넘어온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로 한국에는 없는 낙타가 그러져 있고 자단이라는 나무가 인도 남부 스리랑카 원산지라는 사실로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정말 그럴까? 우선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에서 일본에 낙타를 선물해줬다는 기록이 있다. 더구나 의자왕이 바둑알과 바둑통만 선물했을리가 없다. 
무엇보다도 일본의 주장을 반격하는 가장 큰 증거는 목화자단기국의 화점이 17개라는 사실이다.
17개의 화점은 우리나라 고유의 순장바둑에만 있는걸로 우리나라 바둑만의 특징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통해 보더라도 이 아름다운 바둑판은 백제가 일본에 선물해준 우리의 문화유산이라는게 드러난다.
이 아름다운 백제의 바둑 세트를 보면 백제의 금동대향로에서 보듯 백제 장인의 솜씨와 아름다운 백제의 미적 감각에 황홀함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땅에는 고대의 바둑 유물이 하나도 없으니 일본에 남아있는 백제의 흔적을 통해서나마 우리 고대 바둑의 모습을 살필수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한국 고유의 바둑 순장바둑.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식 바둑에게 대체되어 사라졌다. 화점이 17개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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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 17일 탄생하였고 올해는 그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하지만 건국 헌법은 처음부터 불행한 탄생이었다. 좌우익의 급한 대립 속에 자본주의 + 사회주의의 짬뽕 헌법에다가 몇 주 만에 급하게 만드느라고 많은 해석상의 논란이 있었고 막판에 이승만에 의한 억지 요구로 내각제에서 기형적 국무총리가 있는 대통령제로 바뀌는 바람에 훗날 제왕적 대통령제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이어가는 독재정권의 시발이 되기도 했다. 만약 이때 내각제가 그대로 통과되었으면 이 땅의 현대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반공 이데올로기로 말미암은 방어적 민주주의는 도를 넘어 나치즘을 낳은 바이마르 헌법의 전철을 낳아 박정희의 유신헌법 같은 파시즘 적인 헌법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최소 수십만에서 최대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전쟁과 상관없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되는 비극적인 상황을 낳기도 했다. 이 방어적 민주주의 조항들은 지금도 살아남아 아직도 대한민국이 완전한 민주국가로서의 도약을 막고 있다.
법관임기제의 도입으로 인해 삼권 분립의 토대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기어코 박정희 정권 때는 삼권 분립이 완전히 무너져서 지금도 사법부의 독립성에 대해 많은 국민이 의문을 취하는 현실이다. 또한, 조봉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문금지조항이 삭제되고 사후영장제도의 확대, 구속적부심 문제 등 인권과 관련된 조항들이 개악되어 훗날 독재정권의 각종 탈법적인 고문, 가혹행위, 불법연행 등의 기초를 마련해주고 말았다.
여성을 위한 혼인 및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조항도 보수적인 대다수의 의원들 때문에 마지못해 삽입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에 대한 조항도 마지못해 부실하게 삽입하여 후일 반민특위 활동이 위헌이라는 구실로 탄압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결국 이 땅의 반민족 친일파 척결은 물거품이 되어 다시금 권력을 잡은 친일파와 그 후손들에 의해 지금까지도 그 쓰라린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이 어찌 한탄스럽지 않을까..
이렇게 대한민국 첫 헌법은 많은 문제점을 낳았고 '장식헌법'이라는 오명을 낳았다. 처음 헌법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 뒤 헌법이 독재자들에 의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바뀌었어도 기본 틀은 안 바뀌는데 처음 헌법이 이러했으니 그 후유증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내내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땅의 최고의 법임에도 독재자들에 의해 무시되어 '장식헌법'이라는 오명을 건국헌법부터 제5공화국 헌법까지 40년을 들어야 했던 헌법은 현재의 제6공화국 헌법을 만들면서 서서히 벗겨나가고 있다. 하지만, 불완전한 헌법은 독재자들의 자기 이익에 의해 무려 9번이나 개정해서 그동안 부분 개정한 미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얼마나 질곡의 역사를 거쳤는지 알 수 있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헌법이 바뀌어 한때는 대통령이 바뀌면 제0공화국이 바뀌는 줄 알고 김영삼 취임시 제7공화국이라고 표현한 사람들도 많은 우습지도 않은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6공화국 헌법이 제정된 지 20년. 이제 다시 개헌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 나라의 헌법은 도대체 얼마나 바뀌어야 완전한 헌법이 될 수 있을까? 세상 이렇게 짧은 역사 동안 이렇게 많이 바뀌는 헌법이 전 세계 자칭 민주주의 국가 중 몇 나라나 있을까? (이승만은 건국 헌법 제정시 툭하면 우선 헌법 제정하고 나중에 조금씩 바꾸면 된다라는 그야말로 헌법을 아주 가볍게 보는 헛소리를 지껄이곤 했다. 우리나라 헌법이 얼마나 가볍게 그리고 대충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는 현실이다.)
돌아보면 너무나도 안타깝고 부끄러운 건국 헌법. 기초적인 토양을 제대로 못 만들어 이 땅의 헌법은 휴짓조각이 되었고 그로 말미암은 고통은 인민에서 국민으로 격하된 이 땅의 민중들이 짊어진 고통이었다.
그리하여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처음부터' 제1조 대한민국은 독재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통령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대통령으로부터 나온다'로 바뀌어서 현재에 이르는 것은 아닐까?

덧) 사실 에필로그에서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막상 4부 걸쳐 글을 쓰다보니 지치고 생각했던 방향과 많이 다르게 나가서 짧게 대충 마무리 한다..ㅡㅡ;; 하고 싶은 얘기도 많았지만 여기서 줄이고 이로써 헌법 60주년을 맞아 쓴 건국 헌법 이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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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자본주의를 지향했지만, 첫 헌법은 극히 사회주의적인 모습을 군데 군데 보여줬다.
그것은 해방 후 38선 이남 남한 국민성향이 사회주의적 좌파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그로 인한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당시 초대 제헌 국회에는 좌파계열과 임시정부 계열이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하여 대부분 후보로 나서지 않았고 이로 인해  좌파세력이 극히 미미했음에도 제헌 국회가 사회주의적인 조항을 헌법에 넣었거나 심각하게 고려했던 점은 남한이 얼마나 사회주의적 성향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만약 좌파 세력이 선거에 참여했으면 제1당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한국전쟁이 안 일어났거나 최소한 박정희의 5.16쿠데타가 없었으면 남한도 서유럽 국가(특히 서독)들처럼 좌파 정당이나 최소한 진보적 정당이 정권을 잡고 사회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게도 한다.
사실 사회주의적 정책은 임시정부 때부터 추진하고 있었다.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토지와 주요 산업의 국유화였다. 이러한 정책이 공산주의적 사상으로 생각하는 지금의 인식과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특히 제헌 국회에서 가장 큰 우익 세력이었던 한민당의 정책에도 사회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담고 있으니 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보장, 중공주의 경제정책 수립,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 토지 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등이 그들의 정책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한나라당이 사회주의 정책을 내세운다는 얘기다.

첫 헌법의 모체 격인 조선임시약헌만 보더라도 생필품의 통제관리, 농민 본위의 토지 재분배, 주요 공업, 광산의 국영 또는 관리, 최저임금제 시행, 기업 경영에 노동자의 참여, 사회 보장 보험 제정 등 지금 봐도 서유럽의 사회주의적 정책을 훨씬 뛰어넘는, 과연 자본주의 헌법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의 정책들이 들어가 있다.
비록 미군정에 의해 인준을 못 받고 폐기됐지만, 이 약헌은 건국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무시 못할 조항들이었다.
그리하여 헌법 제정 과정에서 사회주의적인 요소들이 논란이 되었는데
제86조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인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한다.
이 조항은 대한민국의 경제적 이념을 일부 방해가 되지 않는 한 국가가 경제 전반을 통제한다는 통제 경제를 원칙으로 한다는 선언이었다. 사실상의 사회주의 선언과 마찬가지 조항이었고 우익 계열의 한민당 의원들이 주로 비판을 했지만,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그대로 통과됐다. 그 외에도 주요 기업과 지하자원의 국유화 또는 공유, 대외 무역의 국가 통제, 필요시 사기업의 국유, 공유화 가능 등의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은 정책들도 모두 통과됐고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정책은 쉽게 통과되기도 했다.
하지만 적산(일제가 남기고 간 재산)을 국유화 한다는 조항은 삭제되었는데 적산은 그 뒤에도 위 조항들을 화석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적산이 국가재산의 80% 해당하는데 이에 국유화 없이는 위 정책의 실현이 여러 가지로 어려웠는 데 삭제된 이유는 미군정의 눈치 때문이었다.
훗날 적산은 친일파와 돈 있는 자본가들에게 헐값 또는 거의 무상에 가깝게 넘어갔고 현재 수많은 대기업이 이 적산을 헐값에 인수해서 그 싹을 틔운 것으로 지금 이 땅의  망국적 천민자본주의 실현에 기초가 됐다..
헌법에 또 다른 사회주의적 조항 중 가장 눈여겨볼 것은
제18조 2항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의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

이른바 근로자의 이익균점권을 보장하는 조항으로 너무나 공산주의적 색채가 강해서 국회본회의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거쳐 삽입된 것이다.
원래는 근로자의 경영참가권도 강하게 논의됐지만 삭제되고 저 조항만 살아남았다.
이 조항은 국민의 공동재산인 적산을 국유화가 아닌 사유화 시키면 그 이익을 자본가 혼자 갖느냐 아니면 근로자도 발언권과 이익을 나눠 갖느냐는 의문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렇게 사회주의적인 조항이 많은 논란 끝에 들어간 것은 앞에서 얘기한 좌파적인 국민 여론을 의식해서였지만 별로 실행할 의지도 없는 국민 눈치 보기 조항이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대한민국 건국 헌법은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체제 속에서도 사회주의 색채가 짙은 특이한 헌법의 새로운 실험은 하지만 제대로 실행되지도 못한채 2년 후 일어나는 한국전쟁에 의한 반공 이데올로기와 적산이라는 걸림돌로 인해 독재자들을 위한 재벌 길들이기와 위정자들 배부르게 만드는 데에만 쓰였을 뿐 국민을 위한 정책으로서는 사문화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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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처음부터 여지까지 안 바뀌었고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큰  규정이다. 그런데 '민주공화국'이라는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실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정의가 모호한 항목을 왜 제1조 1항에 넣었을까? 그만큼 우리 헌법이 졸속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은 아닐까? 사실 처음 헌법 기초 안이 불과 7일의 시간만 주어지는 등(물론 나중에 연기됐지만) 1개월여 만에 만들어졌다. 세상에 한 나라의 첫 헌법을 1개월여 만에 만드는 나라가 있을까?
이렇게 서두른 이유는 8월 15일에 정부를 수립하려는 이승만의 욕심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그 후로도 헌법 제정에 사사건건 개입을 하여 헌법 초안을 엉망으로 만드는 등 자신의 독재자적인 욕심을 이때부터 이미 서서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1항의 국호인 '대한민국'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당시까지 정의된 국호가 없었기에 유진오의 초안에는 '조선은 민주공화국이다'로 되어 있었다.
당시 여러 가지 국호가 나왔지만, 국회 헌법안 심의과정에서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로 대한민국으로 결정 났다. 대한민국으로 정한 이유 중에는 대한제국의 법통을 계승해야 일본으로부터 보상을  받기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임시정부 때부터 써오던 것이라는데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제국주의적인 국호라고 반대의견도 많았었고 이 의견도 설득력 있다. 차후 통일이 되더라도 제국주의적인 국호는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공화국 또한 임시정부 헌법 때부터 유지되어오던 항목이다.
공화국이란 공화제를 채택한 나라를 말하는 데 반대로 군주제가 있다. 군주제는 말 그대로 왕이 국가원수인 나라로 영국, 일본, 호주, 캐나다, 네덜란드, 태국 등의 나라를 말한다.
공화국이 민주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산국가도 공화제를 채택한 나라가 있고 과거 우리나라도 공화제를 채택했지만, 대통령이 조선시대 왕보다 더한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독재국가가 아니었던가? 반면 군주제인 나라들 상당수가 입헌군주제로 명목상의 왕일 뿐이고 특히 캐나다, 호주 등의 나라는 사실상 독립국으로써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므로 공화제와 군주제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오히려 공화제를 채택한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보다 더 민주적인 국가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민주공화국'이라는 표현은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의견이 분분하고 민주주의 국가를 상징하는 정의라고 할 수도 없다.
재미있는 것은 군주제인 우리나라가 강제로 왕정이 폐지되고 불과 10여 년 만에 임시정부에서 공화제를 채택했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공화제에 대한 얘기가 전혀 없었고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왕정을 옹호했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다른 나라와 달리 군주파와 공화파의 싸움도 없었고 별 다른 의견도 없이 해방 후 임시정부의 공화제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정착했고 그 뒤로도 이 문제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얼마 전 드라마 '궁'이 방송하면서 잠깐 군주제를 부활하자는 미친 소리가 부상했지만, 그것도 다시 수그러들었을뿐...
다른 나라와 달리 이렇게 쉽게 공화제가 정착된 이유는 조선의 무능력한 군주로 말미암아 (요즘 명성황후가 마치 나라를 구하려고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왜곡되었지만,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그녀는 나라는 전혀 상관없었고 오히려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을 재촉만 했다.) 나라가 망했고 망하고 나서도 이 땅의 독립을 위해 백성과 같이 투쟁을 하기는 커녕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일본의 비위를 맞추는 등의 행동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물론 해방 후에도 왕정제는 전혀 고려치 않은 관심밖에 일이었고 그뿐 아니라 조선 황실은 해방 후에도 '왕따'를 당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후부터 지금까지도 우리의 헌법은 조선 시대 왕보다도 더한 절대권력을 부여하고 있으며 박정희 때는 영구집권까지 보장했으니 과연 왕정제를 완전히 극복한 걸까?

당시 공화제를 채택하면서 정부 형태는 의원 내각제를 채택했다. 의원 내각제는 만장일치로 쉽게 통과됐으나 내각제를 할 경우 사실상 아무런 권한이 없어지는 대통령직에 대해 불만을 품은 이승만에 의해 억지로 대통령제로 바뀌었고, 제2공화국 때 잠시 의원내각제가 된 것 외에는 지금까지 대통령제로 남아 강력한 제왕적 대통령제의 시초를 마련했다. 사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헌법안을 수정한 김준연은 총리 및 국무회의의 권한을 키워 대통령을 견제하기 위한 내각제적인 장치를 마련했지만, 너무 급하게 만드는 바람에 해석상의 논란이 생겨 이 헌법의 특별한 장치는 거의 제 구실을 못했고, 그 후로도 현재 6공화국 헌법에 이르러서도 김영삼 정부 시절 총리였던 이회창 총리가 이에 대해 거론하며 김영삼 대통령의 권한에 도전했다가 쫓겨나는 일도 벌어진 적도 있다.
그래서 총리를 얼굴마담이라고 불리었던 헌법상의 내각제적인 총리 및 국무회의의 권한은 노무현 정부 들어서야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지금의 이명박 정부 들어서 다시금 그들의 권한이 축소되고 말았으니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가? 아마 김준연도 헌법상의 내각제적인 요소가 제왕적 대통령제에 의해 사문화될 줄을 꿈에도 생각 못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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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7월 17일 제헌 60주년에 맞혀 글을 쓰려고 했다가 늦어졌다...

올해 7월 17일은 이 나라의 첫 헌법이 탄생한 지 60주년 되는 날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이렇게 뜻깊은 날이 처음으로 공휴일에서 제외되고 나라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사건으로 그다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아서 아쉽다.
원래는 60주년에 맞혀 건국 헌법에 대해 장황하게 쓰려고 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포기하게 됐고 그냥 몇 가지 일화나 쓰려고 한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촛불집회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노래 하나가 '헌법 제1조'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학교 다니던 분들은 하도 많이 불러서 많이 아는 노래겠지만 요즘 세대에게 생소한 이 노래가 이번 집회 덕분에 다시 알려져서 헌법 1조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됐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사실 우리나라 헌법은 독재 정권이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9번이나 바뀌어 누더기가 되다시피 했고 처음에 만들어진 헌법과 많이 달라졌지만,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을 상징하는(그러나 명목적이었던) 헌법 1조는 변한 것이 없다.
다만 1조 2항은 박정희의 유신헌법때 주권이 사실상 박정희한테 있다고 바뀐적이 있을뿐이다.

하지만, 처음 초안 된 헌법 1조는 지금과 다른 게 있었다.

헌법 초안을 만든 유진오 박사의 헌법 제1조를 보자
초안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 발한다

그렇다. 헌법 초안에 '국민'이라는 말은 없었다. '국민' 대신 '인민'이라는 말로 되어 있었다.
인민...,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지만 그렇다고 좋게 들리는 단어가 아니다..
수십 년간 반공교육을 받은 사람뿐 아니라 요즘 젊은 세대에게도 '인민'이라는 말은 공산정권에서 쓰는 상당히 거부적인 단어로 다가온다.
하지만 '인민'이라는 단어는 나쁜 단어가 아니다. 사실 '국민'이라는 단어야말로 부끄럽고 과연 민주주의 상징으로써 어울리는지 생각해볼 단어다.
인민은 영어의 people을 번역한 것으로 하나의 자유인을 뜻한다. 하지만, 국민은 국가에 소속된 또는 종속된 구성원을 뜻함으로 마치 국가에 지배받는 사람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래서 70년대까지도 링컨의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of the people)! 로 번역되곤 했었는데 80년대부터 이런 번역은 사라져가서 지금은 국민의 ... 로 번역된 것밖에 찾아볼 수 없다.
일제 강점기 때도 소학교가 전시체제하에 '국민학교'로 바뀐 것도 일왕에 종속된 국민이라는 뜻이었고 몇 년 전 초등학교로 바뀐 이유 또한 위에 이유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전에는 잘 쓰지도 않던 단어 '국민' 그리고 너무나 익숙한 '인민'이라는 단어가, 지금 처지가 바뀌어서 서로 반대 입장이 된 이유는 이 건국 헌법 제정 당시 초안이 나중에 바뀌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계속 인민이라는 단어를 쓰던 헌법 초안은 본회의 제2 독회에서 제7조 2항에 외국인의 법적 지위에 관한 용어에 대한 토론에서 문제가 되었고 이때 당시 윤치영 의원의
"북조선인민위원회 운운만 하더라도 나는 지긋지긋하게 들립니다. 나는 '인민'이라는 쓰는 데에는 절대 반대합니다."라는 발언에서 비롯됐다. 이로 말미암아 조봉암 의원 등이 반대했지만 결국 헌법 초안에서 '인민'이라는 단어는 빠지고 당시로써는 생소하게 들리는 '국민'이라는 단어로 바뀌었으니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개개인이 자유인인 '인민'에서 국가에 종속된 '국민'으로 전략하는 순간이었고 제1조 2항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은 결국 명목적인 항목이 되어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수십 년 동안 독재정권의 휴지 쪼가리로 바뀌는 비극적인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뢰벤쉬타인이 말하는 명목적 헌법 또는 장식적 헌법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의 첫 헌법의 탄생이 이러한 비극으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인민보다 국민이 생소했다는 것은 48년 7월 17월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헌법 서명 공포식에서 행한 이승만 당시 국회의장의 공포사에서도 볼 수 있다.
"삼천만 국민을 대표한 대한민국 국회에서 ... 이 헌법이 우리 국민의 완전한 국법임을 세계에 선포합니다.
.... 이날 이때에 우리가 여기서 행하는 일이 영원한 기념일이 될 것을 증명하여 모든 인민이 각각 마음으로 ..."
이승만은 공포사를 낭독하면서도 국민이라는 말을 쭉 쓰다가 인민이라는 단어를 무심코 말하기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48년 7월 17일 이승만 당시 국회의장이 건국 헌법에 서명하고 있다.


후에 헌법 초안자 유진오는 그의 회고록에서
"'국민' 은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뜻으로 국가우월주의 냄새가 풍기는 반면, '인민'은 '국가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를 의미한다."면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좋은 단어 하나를 빼앗겼다." 라고 한탄했다..
그리하야 레드콤플렉스에 갇힌 '인민'이라는 단어는 반공드라마에서 빨갱이들이나 쓰는 단어로 전략했고 작년 남북정상회담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한에서 방명록에 '인민은 위대하다'라는 말을 쓴게 문제가 될 정도가 됐다. (인민은 위대하다.. 인민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나면 이 말 참 가슴 벅차오르는 말이 아닌가?)

이렇게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단어는 인민뿐이 아니다. '동무'라는 말도 북한이 쓴다고 하여 부지불식간에 전혀 쓰지도 않던 '친구'라는 단어로 대체되었고 '노동자'는 '근로자'로 대체되었다. 이 땅의 비극적 역사의 한 단면이다.

덧)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도 사실 영어에 영향을 받은 일본어 투 말이다. '국민에게서 나온다'가 맞는 말이다. 수십 년 동안 헌법이 9번이나 바뀌었으면서 제일 유명하고 제일 중요한 1조의 일본어 투는 한 번도 바뀐 적이 없고 아마도 문제조차 된적이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제일 중요한 헌법 제1조가 위정자들에게는 오히려 귀찮은 문장이므로 신경을 안써서 그런것이 아닐까? 나도 이 글을 쓰면서 발견했다. 처음에 무의식적으로 제목을 인민에게서 나온다로 했다가 어쩔수 없이 헌법에 나온 엉터리 말투 때문에 제목을 헌법에 나온 일본식 말투로 고쳐야 했다. 그래도 무의식적으로 제대로 된 말투로 글 쓴 거 보면 나도 국어 교육은 제대로 했군... 흠흠..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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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두 방송사에서 일지매가 드라마를 탄다고 한다. 10여년 전 장동건이 주연한 드라마 일지매를 기억하시는 분이 있는지?
그때의 장동건과 지금의 장동건을 비교하면 연기력이 참 일취월장한듯 하다..
얘기가 샛길로 빠졌는데 일지매 하면 고우영 원작의 만화 일지매가 유명하다. 한 드라마는 고우영 원작과는 다르다는데..
어차피 고우영도 자신이 밝혔듯이 이야기 전체가 100% 창작이었으니 뭔 상관이랴..
그렇다면 진짜 일지매의 정체는 무엇일까? 과연 실존했던 인물일까?

일지매 얘기로 가장 유명한 기록이자 사실상 유일에 가까운 기록이 조선 순조 때 문인인 추재 조수삼(1762~1849)의 추재기이(秋齊紀異)에 실린 간략한 글과 한시뿐이다.

一枝梅 一枝梅盜之俠也。每盜貪官汚吏之財。自外來者。散施於不能養生送死者。而飛簷走壁。捷若神鬼。被盜之家。固不知何盜也。而乃自作朱標刻一枝梅爲記。盖不欲移怨於他也。
일지매는 도둑 중의 협객이다. 늘 탐관오리들의 뇌물을 훔쳐, 먹고살 길 막막하고 죽은 자를 장사지낼 힘조차 없는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다. 처마와 처마 사이를 나는 듯이 다니고 벽을 붙어다니니 날래기가 귀신같아서 도둑맞은 집에서는 어떤 도둑인지 몰랐다.
그리하여 스스로 붉은색으로 매화 한 가지를 그려 놓았다. 다른 사람이 의심받지 않게 해서였다.


血標長記一枝梅。施恤多輸汚吏財。不遇英雄傳古事。吳江昔認錦帆來。
매화 한 가지 증표로 남겨두고
탐관오리 재산으로 가난한 이 돕는다.
때 만나지 못한 영웅 예부터 있었으니
옛적에도 오강에 비단 돛 떠올랐었다.

마치 일지매가 실존했듯이 쓰여 있지만 추재도 밝혔듯이 일지매 이야기는 어릴 적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기록을 찾아보자.
홍길주(1786~1841)의 수여연필(睡餘演筆)에서 우리는 다시 일지매를 만날 수 있다.
수여연필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재밌게 얘기하는 이야기 대부분은 사실은 중국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성과 한음 이야기도 대부분 중국 이야기라는 것이다. (오성과 한음 이야기는 진짜 지어낸 이야기다.)
거기서 일지매 얘기도 나오는데.

又如大盜名一枝梅者, 或謂之李貞翼公爲將時人, 或謂之張大將鵬翼時人, 后卻於歡喜寃家中見之.
또 큰 도적 중에 일지매라 하는 자를 두고 어떤 이는 정익공 이완이 포도대장을 할 때 사람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장붕익이 대장 노릇할 때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나중에 환희원가(歡喜寃家)라는 책 속에서 이를 보았다.

라고 밝혔다. 즉 자신이 어릴 때부터 듣던 일지매는 사실은 중국의 환희원가(歡喜寃家)라는 책에 실린 글이라는 것이다.
환희원가는 청나라 때인 1640년에 쓰인 화본소설(話本小說)로 요즘으로 말하면 에로틱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 맨 마지막 회인 24회에 일지매공설원앙계(一枝梅空設鴛鴦計)라는 제목으로 일지매에 대한 두 가지 글이 실려 있다.
또한, 1632년에 쓰인 이각박안경기(二刻拍案驚奇) 39편에도 명나라 때 도둑 나룡이 나오는데 이 도둑을 일명 일지매라고 불렀는데 환희원가나 추재기이에 소개한 것처럼 그가 도둑질한 곳에 매화 그림을 그려놓았기 때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실 이 일지매 이야기도 명나라 때 쓰인 서호유람지여, 고금소해 등에 실린 '我來也'라고 쓰고 가는 도둑 이야기가 모티브가 된듯하다.
아무튼, 일지매 이야기는 소설 속 가상의 인물 이야기며 이것도 중국에서 넘어온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 장지연이 매일신보에 일지매 이야기를 실으면서 다시 등장한다. 장지연은 특이하게도 일지매의 말로도 전하고 있다.
일지매는 남의 재산을 훔쳐 나눠줘도 자신은 소유하지 않아 남의 집에서 밥을 빌어먹으며 고생하다 결국은 붙잡혀 죽는다며 결코 행복하지 못한 결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로도 계속 일지매 이야기는 살이 붙어 지금은 가지각색으로 변형된 일지매가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다.

일지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걸까? 나는 일지매에 대한 자료를 찾다 재미있는 기록을 발견했다.
숙종 때인 1716년 승정원일기 9월 4일자에 초복(初覆)에 죄인 일지매를 풀어주는 것에 대해 논의하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다. 初覆이라 함은 죽을 죄를 지은 죄인에 대한 첫 번째 심리를 말하는 것인데 여기서 일지매를 풀어주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에 왕이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사에 기록된 유일 무일 한 일지매에 대한 글인데.. 여기서 말하는 일지매는 과연 누구를 뜻하는 걸까?
혹시 일지매가 정말로 실존했던 걸까? 아니면 일지매를 사칭한 악당일뿐일까? 더 이상 자료가 없기에 알 길이 없다..
하나의 수수께끼를 남기고 일지매에 대한 추적은 여기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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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신문에 실린 글 황룡사 9층 목탑 조기 복원한다.
이 기사 처음에 보면 '세계 최대 높이의 목조 건물로 추정되는 경주 황룡사(皇龍寺) 9층 목탑(높이 82m 추정)의 복원이 770년 만에 적극 추진되고 있다.'라고 나와 있다.
과연 황룡사 9층 목탑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목조건물이었을까?
황룡사 9층 목탑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예전에 썼던 글이 있으니 참조하시길..
2006/03/29 - [인문학 산책] - 신라의 랜드마크 - 황룡사 9층 목탑 

황룡사 9층 탑보다 더 큰 목탑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존재했다.
먼저 우리나라의 목탑들을 보자
황룡사 9층 탑은 높이가 약 82미터 추정된다. 그에 반해 고구려 때 세워진 평양 청암리사 목탑은 90미터. 역시 평양의 상오리사나 정리사 목탑은 7,80미터로 추정되고 고려말 조선 초에  세워진 지리산 실상사 목탑의 경우 약 85미터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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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목탑지

.
또한 하남 동사지 목탑은 높이가 100미터로 추정되는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우리나라에만 해도 황룡사 목탑보다 크거나 맞먹는 목탑이 여럿이 있었다.
중국에 경우 세계에서 가장 큰 영녕사 목탑이 있었는데 북위 시대인 516년 완공된 이 탑의 높이는 무려 134미터였다.
일본에도 789년 세워진 동대사 목탑은 높이가 100미터였다.
이상의 예에서 보듯이 황룡사 9층 목탑보다 큰 목탑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도 있었음에도 자꾸 세계 최고의 목조건물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애국심으로 비롯된 과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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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목탑 비교도. 오른쪽부터 중국 영녕사 목탑, 경주 황룡사 목탑, 익산 미륵사지 목탑이다. 위 왼쪽에 그련진 면적만 봐도 엄청난 차이가 보인다. (나라 문화재연구소 문화재 도록 <아스카 후지와라쿄 전> 아사히신문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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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지어진 154미터의 중국 천녕보탑. 영녕사 목탑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성급한 복원도 문제다.
기사를 보면 빠른 시일 내에 복원하겠다는데 여기서 과연 이것이 복원인가 되짚어봐야 한다.
복원이란 '고증'을 통해서 본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지만, 사실 황룡사 목탑뿐 아니라 황룡사에 대한 정보는 터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이것은 복원이 아니라 상상력을 통한 창조일뿐이다.
실제로 황룡사 목탑에 대한 복원도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꾸준히 만들어졌지만 아직도 수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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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탑의 복원도.  좌측 맨 위가 1930년대 후지시마(藤島亥治郎)가 일본 건축학회지인 '建築雜誌'에 실은 최초의 복원도. 오른쪽은 김인호 안, 두 번째 줄 왼쪽부터 장기인 안, 오른쪽 김정수 와 박일남 안, 마지막 줄 왼쪽은 북한 안, 오른쪽은 90년대에 만들어진 김동현 1안과 2안으로 지금 흔히 볼 수 있는 황룡사 모형도는 김동현 안을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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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가장 최근인 2001년 고 권종남 교수의 복원도.

이렇게 복원도도 가지각색일 정도로 황룡사 9층 목탑의 형태는 확실하지 않고 또한 내부의 모양은 더욱더 미스터리고 이것을 지을 수 있는 기술조차 아직 없는 상황에서 수천억을 들여 빨리 짓자고 하는 것은 성급하고 위험한 생각이다.
박정희 시대 때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지금의 황룡사 터에 시멘트로 지으려고 했던 아찔한 경험과 현재 백제문화단지에 지어진 능산리 사지 5층 목탑이나 미륵사지 석탑 복원에 대한 여러 비난 의견에 비추어 볼 때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결정지어야 할 것이다.
특히 지금의 황룡사 터에 짓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말 것이다. 지금도 광화문 복원 공사 중 발견된 터때문에 그 위에 복원하는 것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는데, 확실하지도 않은 모습에서 지금의 황룡사 터 위에 짓는 것은 후대에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2006/05/03 - [인문학 산책] - ''잃어버린 왕국'' 백제가 부활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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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지도를 보면 이상한 곳이 하나 보인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러시아라고 써있는 곳이 그곳이다. 이름은 칼리닌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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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러시아에서 600km나 떨어진 이곳에 러시아의 영토가 있을까? 이곳은 구소련 시절 옆나라인 리투아니아,벨로루시가 러시아의 영토로 같이 붙어있다가 1991년 소련이 무너지고 두 나라가 독립하면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남게된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원래는 독일땅으로 이름도 '쾨니히스베르크'였으나 1차대전때는 폴란드속의 독일영토가 되어 2차대전 발발의 도화선이 되었고 2차대전이 끝나고는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되어 당시 러시아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칼리닌의 이름을 따서 칼리닌그라드로 바뀌었고 구 소련 붕괴후는 이제는 다시 폴란드속의 러시아영토가 되는 불운한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약 100만명의 인구중 78%가 러시아계이고 구소련 시절 서방과의 대치지점이자 부동항(겨울에도 얼지않는 항구)으로 각종 전함이 몰려있던 군항이었다. 그래서 당시만해도 10만명의 군사가 주둔했지만 현재는 1만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군시설도 대부분 상트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로 옮기고 현재는 상업항구로 탈바꿈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최근 미국의 MD계획에 대항해 푸틴은 이곳에 미사일 기지를 짓는다고 발표도 했지만..
그런데 이곳이 구소련 붕괴후 러시아와 떨어지게 되자 문제가 생겼다. 한때는 소련이라는 같은 국가여서 자유롭게 드나들던 리투아니아가 독립하면서 반러시아 정책으로 비자 발급없이는 리투아니아를 통과해서 러시아로 갈수 없게 되었고, 같은 공산국가였던 폴란드도 유럽연합(EU)에 가입하면서 솅겐협정에 따라 입국시 비자를 요청하게 되어 러시아로 가기가 매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로 칼리닌그라드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게 되었다. 석유, 호박(보석의 일종, 칼리닌그라드는 전세계 호박 생산의 90%를 차지한다. 구소련 시절에는 접근이 금지되었던 호박광산이 지금은 직접가서 캐보는 체험도 할수 있다.)등의 자원과 유네스코 세계자연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코르동 데 쿠르 생태공원등 관광자원도 있고, 러시아에서 두번째로 많은 어선을 보유하고 있으며 독일과 폴란드등에 인접해서 경제적 잠재성이 매우 높아 외국인 투자를 받아 발트해의 홍콩을 꿈꾸었던 칼리닌그라드는 하지만 자칫 독립운동으로 비화할것을 우려한 러시아 본토의 압력에 의해 외국인 투자를 통한 경제발전 계획이 좌절되었다.
하지만 최근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유럽연합 가입에 따라 자치권이 확대되어 외국인 투자가 확대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도 대우일렉과 기아자동차가 진출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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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얼마전까지 칼리닌그라드에 관심이 없던 독일은 과거 자국의 영토였던 이곳에 최근들어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 2004년 독일영사관을 세우고 BMW공장을 세우는등의 투자를 하고 있고 역시 인접국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도 중요 투자자이며 덴마크와 스웨덴도 발트해의 안정을 위해 협력관계를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체첸 문제등으로 골치아픈 러시아 정부가 이곳에 자치권 부여를 계속 거부하고 있고 앞에서 얘기한 미국을 겨냥한 미사일 기지 건설 계획을 발표하는등 아직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과연 발트해의 홍콩이 될지 아니면 유럽연합의 섬으로 고립되어 지금처럼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러시아의 유일한 역외 영토가 될지..
 

칸트는 러시아 철학자?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1724~1804)는 당시 독일영토였던 칼리닌그라드(당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이곳을 한번도 떠나지 않고 이곳에서 죽어 역시 이곳에 묻혔다.
그가 묻힌 성당은 당시에는 루터파 교회였지만 지금은 러시아 정교 성당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독일 사람들은 자국의 유명한 철학자를 만나기 위해 러시아땅을 방문해야만 하는 불편을 겪고 있다.
그렇다면 칼리닌그라드에서 태어나 한번도 떠나지 않은채 이곳에 묻힌 칸트는 독일 철학자인가 러시아 철학자인가?

위상기하학의 출발 -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학창 시절 학교 수학시간에 배웠을 한붓 그리기를 알것이다. 
그 이야기의 장소가 바로 칼리닌그라드다. 당시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였던 이 곳에 7개의 다리를 한번에 건널 수 있는가 하는 논쟁의 해결법으로 제시된 한붓 그리기 문제. 그것이 위상기하학의 출발이었고 그 고향이 칼리닌그라드였다.

쾨니히스베르크(칼리닌그라드)의 다리 문제. 결론은 한번에 7개의 다리를 건너는 것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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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온빛누리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던것과는 다르게 여성의 권익이 높았던 조선은 임진왜란과 양란을 거치면서 강화된 성리학으로 인해 여성의 권익은 급격히 축소되고 수천년간 이땅에서 볼수도 없었던 남아선호사상도 생기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여성의 바깥 외출도 극히 제한되게 된다.
그러한 여성에게도 외출의 자유가 있는 시간이 있었으니 통행금지(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직전인 밤 8시부터 10시 사이다. 밤 8시가 되면 남자들은 빨리 들어가라는 종소리가 울렸고 여자들은 초롱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여성들에게 범죄의 위험없이 산책할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2시간의 자유. 그 고요한 저녁 시간동안 여자들은 아무 걱정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산책도 하고 친구와 친지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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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저녁은 여성들의 밤이었다.

이러한 규정은 대한제국때까지 시행되었던 것으로 중간에 폐지되었던 적이 있었지만 그러면 사고가 발생해서 더욱 강력하게 시행되었다고 이사벨라 비숍[각주:1]은 말하고 있다. 이 규칙에서 예외인 남자들이 있었으니 관료들과 외국인, 그리고 장님들이었다. 그래서 장님도 아니면서 검은안경을 끼고 장님인체 하며 밤거리를 돌아다니다 걸린 사람들도 자주 있었다고 한다.
자유가 제한되었던 조선 후기의 양반 여성들. 그들에게도 안심하고 돌아다닐수 있게하여 콱 쥐어오는 유교적 압박의 숨통을 틀어주던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2시간만의 자유였지만 깜깜한 밤 거리를 메우는 여성들의 초롱불, 그 모습은 참으로 서정적인 풍경이 아니었을까?


  1.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189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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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나 방송들을 보면 본국검법(本國劍)이 신라의 검법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검법이라고 한다. 어느곳도 본국검법이 신라의 검법이라는 것에 의문을 표한것을 못보았다.
본국검법이 신라때 검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것은 20년전으로 당시에는 별로 인기 없던 검도를 학교에서 무조건 배워야 했는데 당시 검도 선생이 본국검법을 가르쳐주면서 신라의 검법이라고 한것이다.
(검도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것은 나한일, 김정호가 창안한 해동검도가 TV를 통해 알려진 80년대 후반부터다. 당시 무풍지대라는 인기드라마에 나한일씨가 등장했고 이것이 상당한 선전효과를 거두었다. 그 전에는 대부분의 국민이 검도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당시부터 의문시 되던것이 어떻게 신라의 검법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을까 하는것이었다. 삼국시대 역사서는 물론이요 제대로 된 문헌조차 남아있는것이 없는데 어떻게 검술을 적은 기록이 남아 있을까?

본국검법이 나온 문헌은 단 하나! 무예도보통지(武志)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정조14년(1790년) 백탑파로 알려진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가 지은 책으로 특히 그림으로 무예를 나타난게 특징적이다. 이 책에 본국검법이 그림과 함께 나온다.
그럼 이 책에 실린 본국검에 대한 설명을 보자.

'여지승람에 이르기를 황창랑은 신라인이다. 전하는 말에는 7살에 백제에 들어가서 시중에서 칼춤을 추었는데 이를 구경하는 사람이 담을 이룬 것 같았다. 백제왕이 이 이야기를 듣고 불러서 마루에 올라와서 칼춤을 추도록 명하였다. 창랑이 이 기회를 타서 왕을 찔렀다. 이로 인하여 백제국인들이 그(황창랑)을 죽이니 라인(羅人=신라인)들이 슬퍼하여 그의 얼굴 모습을 본떠서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추었는데 그것이 지금도 전한다.라고 (여지승람에서 전)한다.
(중략)신라는 왜국과 이웃하여 그 검무가 분명히 전했을텐데 밝혀낼 수가 없다. 이제 황창랑을 우리나라 검술의 시초로 삼고자 한다(今因黃倡郞爲本國劍之緣起). (하략)'
역시 컴으로 한자 하나 하나 찾아 치는것은 어렵다 ㅜ.ㅜ

황창랑의 이야기는 증보문헌비고, 여지도서, 묵재일기, 현종실록등 조선의 여러 사료에 나오는데 나이만 틀릴뿐 내용은 하나의 책에서 베낀듯 똑같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본국검에 설명조차도 여지승람에 내용 그대로 옮겨온것이다. 이런것으로 보아 모두 여지승람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옮긴듯하다.
근데 이 이야기에 원본으로 보이는 여지승람에서는 황창랑 이야기를 안 믿고 있다.

[이첨(李瞻)이 고증(考證)하기를, "을축년 겨울에 내가 계림에 손이 되었더니 부윤 배공이 향악을 베풀어 나를 위로하는데, 탈을 쓴 동자가 뜰에서 칼춤을 추는 것이 있었다. 물어보았더니 말하기를 '신라에 황창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나이 15,6세쯤되어서 칼춤을 잘 추었는데, 왕을 뵙고 말하기를 신이 원하건대 임금을 위하여 백제의 왕을 쳐서 임금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하였다. 임금이 허락하였다. 곧 백제에 가서 시가에 춤추니 백제의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 임금이 듣고 궁중에 불러 들여 춤추게 하고 구경하였다. 창이 임금을 좌석에서 쳐서 죽이고 황창은 드디어 좌우 신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듣고 울부짖다가 드디어 눈이 멀어졌다.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눈이 도로 밝아지게 하려고 꾀를 내어 사람을 시켜서 뜰에서 칼춤을 추게 하고 속여서 말하기를 '창이 와서 춤을 춘다. 창이 죽었다는 전일의 말은 거짓이다.'하니 어머니가 기뻐 울며 눈이 도로 즉시 밝아졌다 한다. 창이 어려서 능히 나라 일에 죽었으므로 향악에 실어서 전해내려온다고 하였다. 내가 일찌기 삼국사를 보니 모든 관직을 임명하거나 이웃나라를 침벌한 것은 다 씌어 있으며, 해와 별과 우뢰와 비의 변이 초목, 금수의 요괴에 이르기까지 기록하지 않은것이 없다. 나라의 임금이 적국의 아이에게 살해된 것과 어린 아이로서 적국의 임금에게 원수를 갚았다는 것은 다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역사에 실려 있지 않으니 진실로 의심할 만하다. 다만 열전에 관창의 일의 전말이 기재되어 있어서 그의 충의가 장하니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통하게 한다. 이 춤추는 것은 반드시 관창일 것이다. 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무릇 적국에 대하여 변을 내려고 음모하는 자는 혹은 행상 가장하고 혹은 본국에서 죄를 지었다고 거짓말하는 등, 감언과 아첨하는 말로써 속여도 백제가 이미 신라와 더불어 적국이 되어 있었으니, 창이 응당 공공연하게 칼을 갖고 백제의 번잡한 시가의 큰 길 가운데에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였다면 백제의 사람들이 창을 붙잡아다가 장차 형을 갖추어서 고문하였을 것이다. 어찌 내버려 두어서 임금의 뜰에서 행악을 하게 하였겠는가. 이것은 인정과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옛삼으로 관창과 비겨서 가즈런히 논할 만한 자를 찾으니, 춘추에 대공 11년에 노나라의 소년 왕기(汪錡)가 공을 위하여 수레에 같이 탔다가 함께 국서의 나에 죽으매 공자가 말하기를 '능히 창과 방패를 잡고 사직을 호위하였으니 상으로 대우하지 아니함이 옳다.하였다. 의에 죽어 인을 이루는 것은 진실로 어려운 일인데, 동자로서 감히 이러한 일을 한 자는 홀로 왕기와 창에게서 볼 수 있다. 이야기가 잘못되어 있기에 변백하지 않을 수 없다. 창의 춤을 보는 자를 위하여 고증하고 또 따로 역사를 읽는 사람을 위하여 고증한다.'하였다.]

즉 그렇게 큰 사건이 어떻게 신라, 백제 기록에 없느냐 하는것이며 그 외에도 논리적으로 안 맞으니 황창랑이라는 신라인이 혹시 관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쓰고 있다.
자 여기서 황창랑 고사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계림(경주)에 한 소년이 탈을 쓰고 검무를 추는데 그 아이한테 들은거다. 즉 기록이나 어디에 있는것이 아니고 이첨이 경주 소년에게 들은것이 전부다. 그 이야기조차도 이첨조차 믿을수 없을정도로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라고 한다.
당시까지 탈을 쓰고 추던 검무가 전해지고 있었으나 그 기원을 몰라 겨우 알아낸것이 이름 모를 소년에게서라니..
그것도 조사한 당사자조차 믿기지 않는 이야기고.. (이 검무는 대한제국 순종때까지 전해진듯하다)
어쩐지 황창랑 이야기가 모두 조선 중기 이후에만 있더라..
이유원도 믿기지 않는지  자신의 시에서 관창의 이야기가 와전되어 황창랑 설화가 됐다고 한다.
나로서는 황창랑 설화가 관창의 이야기가 와전됐다는것조차 믿기지 않는다. 내용이 완전히 틀린데 어떻게 와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자, 여기서 본국검법 기원의 중요한 팩트인 황창랑 설화가 그 전제부터가 근거가 적은 얘기라는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본국검법이 신라 검법이라는 직접적인 얘기는 전혀 없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왔는가?
바로 이제 황창랑을 우리나라 검술의 시초로 삼고자 한다(今因黃倡郞爲本國劍之緣起) 이 부분이다.
저 부분을 '이제 황창랑으로 하여금 본국검의 기원이 밝혀졌다'라고 해석하는데서 온것이다. 하지만 연기(緣起)와 기원은 분명히 다르고 저 글에 어디에도 황창랑이 본국검을 만들었다는 글이 없다. 본국검(本國劍)은 단지 우리나라 검법이라는 의미일것이다.
또 본국검을 속칭신검(俗稱新劍)이라고 하여 신검을 신라검의 줄인말이라고 해석하는데 신검은 말그대로 새로 만들어진 검법이라는 뜻이다. 만약 신라검술이라면 위에서 신라인을 라인(羅人)이라고 줄였듯이 라검(羅劍)이라고 했어야 할것이다.
신검이 새로운 검술이라는 증거는 다른데서도 찾을수 있다.
1598년 편찬된 무예제보(武藝諸譜)에는 본국검이 안 실려있다가 1759년 편찬된 무예신보(武藝新譜)에 본국검이 실린것으로 추정된다. 무예신보는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내용으로 그 내용을 짐작할수 있다.
또한 무과시험에 본국검이 편입된것이 1785년으로 그전에는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18세기경 본국검법이 창안된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하여 생긴지 얼마안된 검법이라는 이름으로 속칭 신검이라고 불리운게 분명하다.
이런 여러가지 사실로 보아 본국검법은 영조시대쯔음에 만들어진 새로운 검법이지 신라검법이라는 이야기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근거가 약하다.
이건 마치 태껸이 수박도의 같은 무술이라느니 1950년대 이후 일본의 가라테를 베낀 태권도가 삼국시대때 만들어진 전통무술이라고 속이는것과 별 다를바 없다.
우리나라 무술이 오래됐든 최근에 만들어졌든 우리나라 무술이라는데는 변함이 없다. 그걸 굳이 역사를 조작하면서까지 끌어올리려는 이유가 뭔가? 맨날 역사왜곡이라고 일본과 중국을 욕하면서 우리는 그들앞에서 떳떳한지 한번 뒤돌아봐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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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를 통해 고구려의 명장 양만춘이 자주 나온다. 물론 드라마를 역사로 믿어서는 안 된다. 역사서에 기록된 것도 깡그리 무시하고 작가 맘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으니..
역사에 기록된 안시성주는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그 정통성에 홀로 반발하여 결국은 연개소문의 군사하고의 싸움에서도 이기고 당나라 군대가 백만대군을 몰고 와 요동성, 백암성 등을 점령한 상태에서 홀로 싸워서 당군을 패퇴하게 하였고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서도 끝까지 남아서 당나라에 저항한 위대한 장군이었다. (그러니 안시성전투를 연개소문이 지휘하에 양만춘과 같이 싸우는 드라마 '연개소문'이나 연개소문과 양만춘이 친구로 나오는 '대조영'은 몰상식의 극치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정사기록에는 안시성 전투에 대해서는 상세히 전하면서 이 위대한 인물의 이름은 적고 있지 않으니 그냥 '안시성주'로만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가 천여 년이나 지난 조선후기에 이르러 양만춘(春 또는 春이라 한다. 한자부터 기록마다 다르다)이라는 이름이 안시성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조선후기 양만춘에 대한 기록은 성호사설, 동사강목, 열하일기 등 많은 기록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안시성주가 양만춘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을까? 천여 년만의 양만춘에 대한 기록이 발견이라도 된 걸까?
그래서 기록들을 하나하나 추적해가기로 시작했다. 그런데 추적하면 할수록 하나같이 어디서 양만춘이라고 했다. 하고 그걸 추적하면 또 어디서 들었다, 어디에 보았다, 이런 식으로 마치 러시아 인형같이 하나하나 헤쳐나가야만 했다.
결국, 그 귀결은 명나라 때 소설인 '당서연의唐書演義'와 '태종동정기太宗東征記'로 모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 기록 모두 조선 중기 윤근수의 월정만필에 나오는 기록으로

'안시성주安市城主가 당 태종唐太宗의 정병精兵에 항거하여 마침내 외로운 성을 보전하였으니, 공이 위대하다. 그런데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서적이 드물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고구려 때의 사적史籍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임진왜란 뒤에 중국의 장관將官으로 우리나라에 원병援兵 나온 오종도吳宗道란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안시성주의 성명은 양만춘梁萬春이다. 당 태종 동정기東征記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얼마 전 감사 이시발李時發을 만났더니 말하기를, “일찍이 당서연의唐書衍義를 보니 안시성주는 과연 양만춘이었으며, 그 외에도 안시성을 지킨 장수가 무릇 두 사람이었다.”

고 하였다.

즉 임진왜란 때 온 오종도가 당태종동정기에서 양만춘이라는 이름을 보았다는 얘기를 윤근수에게 했다. 그리고 이시발이 (아마도 명나라에 가서) 당서연의를 보니 안시성주는 양만춘이라고 한다는 얘기다.
문제는 이 두 문헌이 현존하지 않는듯하다. 아무리 찾아봐도 나로서는 당태종동정기와 당서연의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럼 우리는 두 사람의 증언을 알아보자.
우선 당태종동정기에 대해서는 건너뛰고 건너뛰는 식의 얘기고 그 책이 어느 때 쓰인 것인지 실제로 존재했는지조차 모르겠다. 아무리 찾아봐도 관련기록을 못 찾겠다. (아시는 분은 알려주세요~)
그럼 당서연의는? 역시 관련기록을 못 찾겠다. 단지 '연의演義'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명나라 때 당나라 역사를 소설 식으로 쓴 책이라는 것만..(나관중의 삼국지연의와 같은 소설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양만춘은 지어진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보통 소설을 쓰기 위해서라면 이름없는 사람이라도 작가가 이름을 지어주게 된다. 여기서도 그냥 안시성주라고 하지 않고 작자가 가상의 이름을 지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왜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느냐면 천 년동안 이름도 전해지지 않던 사람이 유독 소설에서만 이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더 이전인 고려 때 쓰인 안시성 전투에 대한 많은 기록과 시에조차 이름이 없는데 어떻게 더 후세에 정사도 야사도 아닌 소설에 등장한 이름이 신빙성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럼 여기서 다시 오종도가 말한 당태종동정기에 대해 생각해보자. 어쩌면 동정기는 당서연의보다 나중에 쓰였을지도 모르고 당서연의가 소설이다 보니 널리 읽혀서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많이 알려져 거기에 삽입됐을지도 모른다. 또는 오종도가 당시로써는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당서연의로 인해 유명해진 후 다른 곳에서 삽입된 이름을 보거나 들은 것을 당태종동정기에서 봤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정확한 근거가 없이 어디서 들었다 식에 기록은 그 신빙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게 역사학의 진리다.

이런 생각을 나만 가진 게 아닌듯하니

서유문의 무오연행록에는

세상이 전하되, “안시성주를 양만춘楊萬春이라.” 하니, 이 말이 '당서연의'라 하는 책에 있으나, '사기史記'에 나타난 일이 없으니, 족히 취하여 믿지 못하리라 하니, 이는 분명한 의논이라.
이라 했고

김시양의 부계기문에는

아깝게도 역사에서 그의 이름을 잃었는데, 명나라 때에 이르러 '당서연의'에 그의 이름을 드러내어 양만춘梁萬春이라고 하였다. 어떤 책에서 찾아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안시성의 공적이 책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진실로 그의 이름이 잃어지지 않고 전하였더라면 '통감강목通鑑綱目'과 '동국사기東國史記'에 응당 모두 유실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수백 년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연의衍義'에 나오겠는가. 거의 믿을 수 없다.

라고 했다.

이덕무 또한 청장관관서에서 이르기를

안시성 성주가 양만춘이라는 것은 '당서연의'에서 나온 말로, 호사자好事者가 그런 성명姓名을 만든 것이니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고 했으니 조선시대 학자들도 안시성주가 양만춘이라고 하는 것을 못 믿었던 듯 하다.

이상의 기록으로 알 수 있듯이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는 것은 그다지 믿을만한 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명나라 때 소설을 쓰고자 창작한 이름이 후세에 마치 진짜 이름인 듯이 알려지게 된듯하다.
위대한 고구려의 장수 이름이 양만춘이든 뭐든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하지만 ,소설이나 드라마가 아닌 역사학에서는 객관성과 정확성은 생명이다. 아직 남한사학계에서는 양만춘의 이름을 확실하게 인정하지 않아 항상 야사에 전하기를 이라고 토를 달지만 정말 야사에서라도 전하는지는 위에서 찾아봤듯이 의문이다. 그리고 북한학계에서는 안시성주가 양만춘이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앞으로 안시성 성주 이름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할듯하다. (물론 내가 못 찾았을 수도 있지만...)

이로써 기나긴 추적이 끝났다. 많은 시간을 들여 여러 기록을 뒤적였다. 기록을 뒤지면 뒤질수록 더 깊숙이 파고들어야만 했기에 어렵고 시간도 많이 들었지만 나로서는 마치 추리소설같이 흥미진진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한계가 많았기에 틀린 정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당태종동정기와 당서연의에 대해서는 너무나 자료가 불충분했기에 잘못된 판단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자세한 정보를 아시는 분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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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때 홍일동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상당히 기인으로 세조와 농담따먹기까지 할 정도였다.
근데 이 분이 엄청난 대식가였다. 서거정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 분에 대한 재밌는 글이 있어서 소개한다.

"홍일동이 일찍이 진관사(眞寬寺)에서 놀 적에, 떡 한 그릇, 국수 세 주발, 밥 세 바릿대, 두부 국 아홉 주발을 먹었는데,산 밑에 이르니 대접하는 이가 있어, 또 찐 닭 두 마리, 생선국 세 주발, 생선회 한 쟁반, 술 마흔 잔을 먹으니, 보는이들이 대단하게 여겼다. 세조(世祖)가 듣고 홍일동을 불러 묻기를, “참으로 이와 같이 먹었느냐.” 하니, 홍일동이 그렇다고사과하자, 상감은 장사(壯士)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평상시 출입할 적에는 다만 미숫가루와 전술[醇酒]을 먹을 뿐이요, 밥을 먹지않았다. 뒤에 홍주(洪州)에 가서 폭음(暴飮)을 하고 곧 죽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배가 터져 죽은 것이라 의심하였다. 뜻이있어도 시행치 못하였고 벼슬이 그 능력에 차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逸童嘗遊眞寬寺。食餠一器麪三椀飯三藩腐麪九椀。及到山下。有餉之者。食蒸鷄二隻魚羹三椀魚膾一盤酒四十餘觚。觀者壯之。明日世祖聞之。召逸童問曰。信如是能喫乎。逸童拜謝。上曰壯士也。然常時出入。但食餌屑醇酒而已。不喫飯。後到洪州劇飮。尋卒。人疑其爛腹也。有志不施。位不滿能。惜哉。

대단한 식욕이 아닌가? 은항아리에 든 술도 혼자서 한번에 다마셨다고 한다. 얼마나 대식가였으면 폭음으로 죽은것도 사람들이믿지않고 배가 터져 죽은것이라 생각했을까? 참고로 당시 밥 그릇은 지금 밥 그릇의 3배 크기로 요즘 세 끼치를 한끼에 먹었다.
세조가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 중국에 가서 실컷 유람하라고 선위사(명나라 사신 영접하는 관직)라는 벼슬을 줘서 유람시켰으나, 결국 중국 홍주에서 폭음으로 그의 생(세조 10년)을 마쳤으니 안타까워했을 세조의 모습이 느껴진다.
-후세의 시인은 이 사람의 무덤 풀뿌리마다 술 냄새가 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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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오줌을 쌀때는 아무리 재촉을 해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일때문에 황당하게 죽은 왜구 수장이 있었다.
고려말 부산쪽에 왜구가 침임하였는데 강주(현 진주) 원수 배극렴이 박위를 도와 왜구를 치고 있었는데 왜구 장수 패가대만호( 覇家臺萬戶)가 말을 타고 전진해오다 말이 진창 한가운데서 오줌을 싸려고 멈춰 서는 바람에 아군이 맞받아 쳐서 그를 베어버렸다고 한다....
그 왜구 장수 말을 아무리 움직이려고 해도 안 움직이지, 맞은편에서는 고려군이 자기를 죽이러 오는것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어야 하니 그 때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패가망신하는 심정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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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왜구, 장수
오늘 다음에 실린 정로환 기사 보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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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기사 중복된거는 되도록 피해가며 풀어나갈테니 우선 다음기사 먼저 보면 참고가 되겠습니다.
아.. 한가지 다음 기사에 나온 사진중에 '전몰기념환'이라고 나오는데 '전역기념환'입니다. 기자가 한자를 잘 몰랐나봐요..ㅡㅡ
이것이 전역기념환.
처음 나왔을때 정로환 알. 이렇게 큰걸 보니 당시에는 씹어먹은듯?

정로환은 1902,3년경에 만들어졌는데 얼마후 러일 전쟁이 일어나서 당시 군인들에게만 일인당 600알씩 지급되었습니다. 하지만 효능이 괜찮아 유명해지니까 일반인들이 군인들에게 닭한마리와 정로환 한 알을 바꾸기도 했다고 합니다.(征露丸이 '러시아를 정벌하자'는 뜻인데 그렇다면 전쟁이 나기전부터 러시아를 정벌할려고 했단 말인가?)
이 약은 원래 각기병 치료제로 나왔는데 각기병은 비타민 B1이 부족하므로 발생하는것이므로 비타민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이 약이 치료제가 될리는 없었게죠(당시에는 각기병이 왜 걸리는지 몰랐습니다). 오히려 설사, 복통에 효과가 좋아서 유명해진겁니다.
하지만 정로환의 치료효과가 주원료인 크레오소트의 독성으로 인한 신경마미로 장관 운동이 멈추고 지각신경이 마비되서 일어나는것으로 위험하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 약을 판매 금지시키자는 주장도 있고요. 그러니 복용하시는 분은 이 점 숙지하시고 결정하는게 좋습니다.
1974년 일본 대법원 판결에서 '정로환'은 보통명사라는 판결이 나서 지금은 30여개사가 만들고 있고 대만과 일본의약품제작회사의 정로환은 아직도 러시아를 정벌하자는 뜻의 '征露丸'으로 팔리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나라 정로환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요?
동성제약 이선규 회장의 회고에 의하면 원조인 다이코 신약에 가서 물어봤는데 공장장이 자기도 제조법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전 공장장을 찾아가보라 해서 그 옛 공장장에게 '알려주면 사례를 해드리겠다'고 하니 그 노인 왈 '자기는 평생 죽도록 일만 해서 도쿄 구경을 못했는데 죽기전에 도쿄 유곽에 가보는게 소원이다'라고 하는겁니다. 일흔이 다 된 그 노인은 소원대로 도쿄의 고급 유곽에 가게 됐고 거기서 일주일을 머문 뒤 나오면서 소원을 이뤘다며 자세한 제조법을 적은 메모를 줍니다. 그것으로 만든게 '동성 정로환'인데 맛과 향이 일본것보다 더 좋았다는 것이 이 회장의 주장.
이리하여 탄생한 한국 정로환은 1972년 출시되어 대 히트를 기록하였고 그 후 타사에서도 정로환이라는 이름으로 약을 판매 소송까지 갔으나 역시 일본과 같이 상품을 혼동할 염려가 없다는 판결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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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정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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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7세기 헌강왕 재위 시절 신라의 수도 금성(현 경주시). 인구 백만이 넘는 국제도시였던 금성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바둑판으로 잘 정리된 넓은 도로위로는 우마차가 끊임없이 오가고 가끔가다 아랍인으로 보이는 외국인들도 보였다. 초가하나 없는 도시위로 거대한 탑이 우뚝 서있었으니 이 탑이 신라의 3대 보물 중 하나인 황룡사 9층탑이었다. 높이 82m. 25층 높이의 빌딩과 맞먹는 당시 세계 최고(最高)의 목조건축물이었다.

거대한 황룡사
황룡사의 역사는 진흥왕 14년(553년) 원래 궁궐을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 이상히 여겨 절을지으면서 시작됐다. 진흥왕37년(574년) 신라 3대 보물 중 하나인 금동장륙상이 완성됐고 선덕여왕 12년(643년) 역시 신라3대 보물 중 하나인황룡사 9층 목탑이 완성되어 93년의 긴 공사가 끝나고 그 거대한 위용을 드러냈다.
황룡사만 해도 동서288m, 남북281m, 총면적 2만5천평으로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다. 실제로 황룡사 치미가 182cm나 되는걸로 봐도 그크기가 엄청났음을알 수 있다. (황룡사 치미는 세계에서 2번째로 큰 크기로 제일 큰 치미는 평양 안악궁 치미다.) 이 치미가 장식된 중금당의크기만 해도 남대문의 6배였다고 한다.

황룡사 중금당. 지붕위에 치미가 보인다. 현재 제일 먼저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


거대한 금당안에는 높이 4.8미터의 석가여래삼존상이 있었다. 본존상의 무게가 35,700근 황금만 1만 198푼이 들었다고한다.양옆에는 2구의 보살이 있었는데 무게가 12,000근, 금 1만 136푼이 들었다고 하니 엄청나다. 또한 벽에는 유명한솔거의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이 얼마나 생생한지 새들이 날아와 부딪혀 죽었다고 한다.
범종도 있었는데 성덕대왕신종(에밀레 종)보다 4배나 컸었다고 하니 무게만 497,581근이었다고 한다.

거대한 치미. 너무 커서 2개를 이어 붙었다.


황룡사지. 80년대 찍은걸로 추정된다. 현재는 뒤편으로 고층아파트가 자리잡았다.


황룡사 탑의 수난
황룡사 9층탑은 그 거대한 높이때문에 자주 벼락을 맞았으며 또한 지진등에 의해 6차례의 큰 수리가 있었다. 특히 경문왕 11년(871년)에는 지진으로 크게 기운 탑을 완전히 허물고 새로 짓기도 했다.
하지만 1238년 고려 문종 25년에 몽고의 침입으로 685년동안 온 백성에게 숭앙받았던 이 위대한 탑은 결국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대종은 몽고군이 가지고 가다가 강물에 빠트렸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그 강을 지금도 대종천이라고 부른다.
좌-장륙상 대좌    우-황룡사 목탑지

제일 의문이 가는것은 장륙존상인데 많은 서적들이 황룡사가 불탈때 같이 탔다고 잘못 나오고 있지만 조선때 씌여진 '동경잡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조때까지 남아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발굴 조사때도 장륙존상같이 거대한 금속이 녹은 흔적을 전혀 발견못했다. 그렇다면 조선조때까지 남아있던 장륙존상이 어디로 갔을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다.
폐허가 된 황룡사에는 민가들이 들어서 있다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 민가를 모두 철거만 시키고 방치했다. 1964년 12월 17일 황룡사 9층탑의 사리장치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동안 민가에 의해 보호되던 사리장치가 정부에서 친절하게 철거되고 방치되었으니 그냥 가져가라고 한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이 도굴꾼들은 1966년 그 유명한 불국사 석가탑 도굴 미수사건에 범인들로 석가탑 사건으로 체포되어 여죄 추궁중 황룡사 탑 도굴범으로 드러나 사리엄 장구가 다행히 회수됐다. 이 도굴범 배후에는 삼성이 있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1966년 9월 20일자 동아일보 '도굴단 배후에 대재벌이 있다' 와 2005년 12월 3일 MBC '시사매거진 2580' 보도내용 참조) 하지만 사리병과 사리는 끝내 회수되지 않았다.

도난당했다 되찾은 황룡사 사리함. 여기에 탑의 찰주본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수난을 겪은 황룡사 터는 1976년 4월부터 1983년까지 발굴 조사를 하여 앞에서 말한 거대한 치미를 비롯하여 4만여점의 유물을 수습하고 황룡사가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 복원 중 황룡사의 더 큰 위기가 닥치는데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황룡사를 시멘트로 복원하라고 지시를 한것이다.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황룡사를 그것도 시멘트로 복원하라니!
그렇다면 지금 발굴된 터도 완전히 밀어버려 흔적도 없애야 한다. 박통은 그 전부터 문화재에 대한 중요성이 별로 없는지 군사문화재는 시멘트로 대충 복원하고 안그런것은 없애도 된다는 식이었다.
그런식으로 엉터리 복원되거나 영영 사라진것을 열거하라면 끝도 없다. 풍납토성, 백제 고분, 백제성, 달성 고분, 현충사, 오죽현, 수원성, 광화문, 덕수궁, 독립문, 신라 절터, 고구려 군사유적 등등..
다행히 박통이 총에 맞아 세상을 뜸으로 이 계획은 없었던 일로 돌아간다. (박통의 죽음으로 보존된 문화재도 꽤 된다. 석촌동 고분등등..)

황룡사 탑은 어떤 탑인가?

황룡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거대한 9층 목탑으로 한변의 길이만 22.2m였고 높이가 183척, 상륜부가 42척으로 합해서 225척이었다고 한다. 특이한것은 대부분의 목탑이 겉에서 보면 여러층으로 보이지만 안에서는 하나의 통층으로 되어 있는데 반해 황룡사 탑은 각각의 층이 있어서 꼭대기까지 계단으로 올라갈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탑은 원래는 황룡사에 없던것이었는데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이 태화못가에 나타난 신인에게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라고 하여 선덕여왕에게 구층탑의 건립의 필요성을 말하여 백제의 아비지를 초청하여 만들어지게 된것이다.
9층 탑은 1층부터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 등 아홉나라를 상징하여
이들 나라로부터 침략을 막기위한것이다. 이들 나라중 몇몇 나라의 정체는 수수께끼에 쌓여있다.
높이 82m의 이 목탑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목조건축물이었다. 이보다 높은 탑은 북위때인 516년 완공된 영녕사 목탑이 있었는데 높이 134m로 여지껏 만들어진 목탑중 가장 높았지만 얼마 안된 534년 화재로 불타 없어졌다. 모두 타는데 3개월이나 걸렸다고 한다.
이 영녕사 목탑은 중심에 흑벽돌로 만든 중심 기둥이 있어 쇠못 하나 없이 나무로만 지은 황룡사 탑에는 기술적으로 딸린다.
789년에는 일본 동대사에 100m 크기의 목탑이 만들어졌지만 통층 형식이고 기단도 작아 황룡사와는 비교가 안된다. 통층 탑은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고구려 평양에도 80-90m급 목탑이 여러개 있었고 고려때는 지리산 실상사의 85m의 목탑이 있었으며 백제 또는 고려초의 사찰로 추정되는 하남시 동사지에서도 기단 크기가 28미터로 약 100m급의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기록이 없어 통층인지 각층이 있는 탑이었는지는 모른 상태다.

황룡사 탑은 어떻게 생겼을까?
사실 황룡사 탑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기단의 모양, 여러가지 기록, 일본과 중국에 남아있는 목탑을 보면 어느정도 복원을 할 수 있다.
고려시대 김극기의 시에 의하면

층계로 된 사다리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일만강과 일천산이 한눈에 트이네
굽어보니 동도(경주)에 수없이 많은 집들
벌집과 개미집처럼 아득히 보이네

고려 후기 승려 혜심의 시에 의하면

한층 다보고 또 한층 보면서
걸음걸음 올라 점점 넓게 바라본다.
지면은 깍은 듯 평평한데
쇠잔한 백성의 무너진 집을 차마 볼 수 없네

라고 나와 있다.
이 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원형으로 된 층계가 있었으며 한 층 한층 구경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높은 목탑은 중국의 불궁사 석가탑(1056년 건축 67.31m)으로 외관은 비록 황룡사와 많이 틀리지만 내부의 모습은 황룡사 복원에 많은 참조가 된다.
또한 황룡사는 겉에서 보기에는 9층이지만 중간 중간 암층이 있어 실제로는 17층이었던걸로 추정된다. 이것은 1996년 보탑사 목탑을 만들면서 알게 된 사실이명 불궁사 석가탑도 외관은 5층탑이지만 실제로는 9층인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앞에서 얘기했다시피 황룡사는 백제의 기술자인 아비지가 지은것이다. 그렇다면 백제탑 양식을 띄우고 있을것이고 백제의 목탑을 보면 어느 정도 외관을 추측할수 있을것이다.
가장 가까운 예로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을 보면 알수 있다. 미륵사지는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단계에 탑으로 목탑의 원형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일본 호류사(법륭사)의 목탑도 많은 참고가 된다. 이 목탑은 백제의 기술자가 지은것으로 1400년전 백제의 목탑 형식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참조는 경주 남산에 있는 부처바위에 새겨진 탑의 형상이다. 학자들은 이 탑이 황룡사 9층탑을 조각한거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북한 개성 불일사에서 발견된 금동소탑도 고려때까지 남아있던 황룡사탑을 그대로 본뜬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있어 복원에 많은 참조가 되고 있다.
좌- 중국 불궁사 석가탑 내부    중- 일본 호류사 목탑과 금당    우- 북한 개성 불일사 금동소탑

이러한 여러가지를 참고하여 복원한 황룡사가 아래와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이 모습이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다.


황룡사의 복원?
황룡사를 복원하자는 얘기는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앞에서 얘기한 박정희 대통령때부터도 그래왔지만 최근들어 여러군데서 복원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복원에는 여러 난관이 있다.
우선 현재의 황룡사터에 복원한다면 황룡사터는 영영 사라지는것인데 과연 이 복원이 제대로 된 복원인가 하는것이다.
경복궁 복원같은경우 사진등에 의한 자료가 많이 남아있기때문에 확실하게 복원할 수 있지만 황룡사는 이것이다라는 확실한 자료가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복원도는 어디까지나 상상이므로 지금 그 자리에 복원한다면 과연 이것이 제대로 된 복원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래서 최근 제시되는 의견이 다른 곳에 복원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여러가지 난관이 있다. 엄청난 복원비용과 복원 기술이다. 복원비용에만 수천억원이 든다는 얘기도 있으며(이건 과장된 수치라 생각된다) 제일 어려운 문제는 기술이다.
통층 구조도 아닌 각 층이 있는 목탑을 80미터 높이로 지을수 있는 기술을 현재는 가지고 있지 않다.
황룡사의 절반 크기인 보탑사 3층 목탑을 짓는데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이 보탑사 목탑이 황룡사 이후 처음으로 사람이 올라갈수 있는 목탑을 지은것이다. 현재까지 기술이 이 정도다.

보탑사 3층 목탑. 1996년 완공됐다.

현재 부여에 짓고 있는 백제 목탑도 한번도 시도되지 않은 형식으로 지어 여러가지 어려움도 있고 부실공사의 고증도 제대로 안되어 많은 비난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쇠못 하나 없이 나무로만 80m의 황룡사 목탑을 복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원이 강력히 추진되고 있어 우선 현재의 폐사지에 금당과 회랑을 복원한뒤 레이저로 황룡사 목탑을 영상으로 복원하고 그 후 2035년까지 실물을 복원한다니 그 결과가 자뭇 궁금하다.
과연 경주에 황룡사 목탑이 우뚝 서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신중한 복원을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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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온빛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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